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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에 나타난 문무를 겸비한 무사도品位 2006. 6. 21. 10:53
[아래글은 2000년10월31일 친목회원들에게 보냈던 편지글임)
지난번 ‘무도정신’에 대한 글은 일본 무사들의 교양으로서 무도정신이 일본의 역사속에 여러 형태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을 볼 수 있다. 일본의 무술 지도자들은 정신적인 교양과 함께 기술을 철저히 주입시킨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것은 다름 아닌 문무를 겸비하는 교육 체계인 것이다.
일본 근대역사에서 1860년대 메이지(明治)정부에의해 막부의 몰락이 무진전쟁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는데 그 전쟁에서 일어난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250년 동안 일본을 지배해오던 도쿠가와 막부가문이 멸망하자 친막부 세력들이 동맹군을 편성해 관군을 맞아 싸우게 되었다. 이때 마지막까지 싸웠던 지역이 아이즈의 오카마쓰성이였는데 합기도(Aikido)의 기원이된 것으로 알려져있는 大東流柔術(다이토류 아이키 쥬쯔)는 바로 아이즈의 공식 柔術(쥬우쥬쯔) 류파였고 합기도 도주 우에시바 모리헤이의 스승인 다케다 소오가쿠(武田惣角)는 바로 아이즈 출신이다.
아이즈는 전 일본에서 무(武)로 이름을 날린 번이었으며 무사전통이 강한곳으로 일본전역에서 그 모범이 되었던 곳이다.
일본의 거의 모든 번들이 새로운 정부에 복종하며 자국의 안전을 도모하려할 때 아이즈는 자신들을 오랬동안 도와준 막부에 대한 의리를 져버리지 않고 끝까지 막부의 관리들을 감싸고 투쟁하였다. 이 때문에 신정부는 눈에 가시같은 아이즈를 토벌하기위해 관군을 아이즈에 총동원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약 한달동안 벌어진 아이즈와 관군의 전투는 많은 일화를 남기고 관군의 승리로 끝났다.
아이즈의 중신인 모리요조오는 북진일도류(北辰一刀流)를 치바 슈우사쿠에게서 배운 인재였다. 그는 노년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의 아들 토라오와 함께 라이진야마(雷神山) 전투에서 분전하였다. 관군의 신형 무기에 의한 공격은 아이즈군을 압도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모리 요조오는 전 아이즈군에 백병전을 명했고 스스로 선봉이 되어 싸웠다. 그의 아들 토라오는 관군 한복판에 들어가 아이즈군과 관군이 일찍이 본 적이 없었던 장렬한 싸움을 펼쳤다고 한다. 그 훌륭한 검투(劍鬪)에 감명을 받은 관군측 사령관 토사의 이타가끼 타이스케는 잠시 관군의 사격을 멈추게하고 이를 지켜 보았을 정도라고 한다.(영화 라스트 사무라에 소개됨) 그러나 열세는 어쩔수 없이 모리 요조오와 아들 토라오는 함께 전사했고 아이즈군은 거점인 라이신야마를 점령당했다. 그러나 아이즈 전쟁에서 역시 가장 유명한 이야기는 ‘백호대의 비극(白虎隊の悲劇)’일 것이다. 아이즈는 전 번의 남자들이 연령층에 따라 부대가 구성되어 있는 상비군 체제를 가지고 있었는데 20세가 되지 않은 소년의 부대가 바로 백호대였다. 신라의 화랑과 비슷한 단체였다고 보면 된다. 이 백호대는 관군이 아이즈에 들어오자 성에서 나와 적을 요격하며 혁혁한 전공을 올린 아이즈의 주력 소년부대였다. 그러나 하루는 관군과 와카마쓰성의 농성군이 전투를 벌이며 와카마쓰성 일부에 화재가 발생한 일이 있었다. 이 불은 전투가 끝나며 바로 진화되었으나 멀리에서 자신들의 성에 불이 난 것을 본 백호대는 이를 성이 관군에게 함락당한 것으로 착각하였다. 무사에게 성은 단순한 방어진이 아니라 무사의 명예와 뿌리가 간직된 공간이다. 백호대는 성이 함락되었다고 보고 무사로서 더 살아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성을 빼앗기는 수치를 보면 안된다는 생각에 백호대 전 대원은 산 위에서 할복 자결하여 어린 목숨을 끊었던 것이다. 이 백호대(白虎隊)의 비극은 무진전쟁의 가장 큰 비극으로 지금도 전해져 오고 있다.
1945년 2차대전에서 승리한 미군은 전쟁당시 일본군의 무시무시한 돌격에 치를 떨었다. 그들은 일본에 진주한 후 일체의 무도를 금지시켰고 일본인들의 마음에서 무도 자체를 없애려 노력하였다. 그들은 일본군의 정신력과 생사를 초월한 가치관이 나오는 원천이 무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일본군의 과감했던 작전의 이면에는 일본 특유의 정신교육이 있었고 그 교육의 중심에는 무도가 있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차츰 일본인 뿐 아니라 미국인들 사이에서도 무도(특히 검도)의 장점을 살려 패전 후 미국에 의해 새로운 민주주의적인 국가로 탄생한 일본의 스포츠로 육성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이유로 일본의 무도는 패전 후 다시 한번 스포츠로 재 탄생했고 제국주의 일본 당시의 무도와는 아주 다른 현대의 무도로 변화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러한 시대의 흐름속에 일본의 무도는 지금의 모습을 띄고있는 반면 우리나라의 무도는 그 흐름이 단절 된것이 사실이다. 그 흐름이란 류(流)라고도 할 수 있다 즉 류(流)란 말 그대로 흐름을 의미한다. 일본의 모든 무술, 무도는 모두 자신의 기술, 전수, 그리고 운영체계를 이 류라는 말로 표현한다. 쉽게 말하자면 류는 학교 아니면 스타일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학교라고 했을 때 그 의미는 학교의 건물을 의미하는 지형적인 위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그 학교에서 대대로 전해져 내려온 기술체계와 전통을 의미하는 정서적인 것이다. 예를 들어 한 사무라이가 자신을 잇또오류(一刀流)의 검객이라 했을 때 이 사람은 잇또오 잇또오사이 카게히사 (伊藤一刀齊景久)가 16세기 세운 검술의 류파에 소속된 스승에게서 검술을 연마했다는 뜻이며 그는 잇또오류의 전형적인 검술 시스템인 키리오토시(切落し)등의 기술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무사는 자신이 잇또오류에 속한다고 말하는 것으로 자신이 따르는 전통과 자신이 숭상하는 무도의 철학, 그리고 배경을 모두 함축하여 표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의 모든 무술에서 류가 중요시되는 이유는 전통과 자신이 배운 스승을 중심으로 한 역사적 뿌리가 중요시되기 때문이다. 초기에 창시자에 의해 체계화 된 한 류파는 그 창시자 밑에서 공부를 한 제자들에 의해 체계적으로 처음 창시자가 만들었을 당시의 철학과 기술, 그리고 비전(秘傳)이 한데 어우러져 전수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한 검술 류파가 유명해지거나 체계가 잡혀 사회적으로 인정받게 되었을 때는 그 류파의 이름을 말하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그 류파의 기술과 역사, 철학이 머리에 떠오를 수 있게 하는 하나의 이미지 구성의 역할을 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한 류파가 짧게는 몇십년, 길게는 몇백년의 기술을 지나면서도 그 명맥을 유지하게 된다. 한 류파의 창시자는 자신의 기술을 전수하면서 자신의 독특한 무술의 스타일을 자신의 이름, 자신의 본거지, 아니면 자신의 철학을 대표하는 단어를 쓴 후 그 뒤에 “무슨 무슨 류”라고 표현함으로서 자신을 다른 무술가와 무술체계와 구별하게 된다. 그 창시자의 제자들은 그 류파에서 창시자의 지도로 그 류파의 사람이 되는 것이며 이는 일본의 무술인에게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자신이 속한 류파와 자신을 가르친 스승을 통해 자신은 사회로부터 인정을 받기도 하고 멸시를 받을 수 도 있다. 또한 이 류파를 통한 인맥은 일본사회에서 과거 매우 큰 힘이 되어 주었다. 한국사회에서 지연과 혈연이 사회에서 큰 힘이 되는 것처럼, 과거 일본에서는 함께 땀을 흘리며 수련을 한 무사들은 남다른 일체성과 교분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는 같은 한(藩)출신이라는 지연보다 어떠한 의미에서는 더욱 강한 유대를 가져올 수 있는 매개체였다고 할 수 있다. 류파는 한 무술인이 자신이 속한 기술과 철학 체계를 대표하는 것이었던 것이다. 창시자의 밑에서 배운 제자들 중에는 창시자의 허락을 받아 그 류파의 비전까지를 모조리 전수받고 창시자의 뒤를 이어 다음 세대의 류파의 주인이 될 수 있는 자격을 부여받는다. 대체로 이 새로운 류파의 주인이자 차기 대표자는 창시자의 장남인 경우가 많은데 만약 류파의 주인이 아들이 없거나 아들이 매우 뒤떨어지는 인물의 경우에는 자신의 가장 뛰어난 제자나 자신의 사위를 다음 세대의 대표로 내세우게 된다. 이 류파의 주인, 또는 대표를 일본어로 소오케 (宗家)라 하며 이 종가는 창시자가 제창한 그 류파의 체계를 남김없이 그대로 전통에 따라 유지하며 또한 그 다음세대로 전수해야하는 매우 귀중한 사명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창시자 밑에서 기술을 전수받은 제자들 중에는 소오케가 되지 않고 나름대로 나중에 독립을 하는 경우가 필연적으로 생기게 된다. 소오케는 한 사람이므로 나머지는 분가를 하거나 아니면 따로 도장을 여는 경우가 많다. 또한 일부는 다이묘의 사무라이가 되어 요즘 말을 빌리자면 다이묘 밑으로 “취직”을 하게 되는데 이 경우 분가를 한 사람의 가문을 훈케(分家)라 한다. 소오케를 제외한 나머지 제자들도 평생을 소오케와 자신의 류파와 계속된 관련을 맺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이들은 그들의 평생 어느 류파의 수련을 받은 사무라이, 또는 검객으로 자신들을 칭하며 자신의 뿌리를 명확하게 하는 것이다. 류파는 따라서 검과 그 검을 사용하는 기술을 매개체로 한 한 가문의 형성이며 이 가문의 전통은 오랜 역사를 거치면서도 그 전통을 대표하는 종가와 그 전통적인 수련법을 고수하며 자신들을 그 류파의 일원으로 칭하는 제자들에 의해 생명력을 얻어 수백년을 변함없이 계속 지속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현재 한국의 무술계는 한명의 스승과 기술의 흐름을 중심으로 한 전통이 찾아보기 힘든 안타까운 현실에 놓여 있는 것이 사실이라 할 수 있다. 한국에는 많은 무술의 스타일이 존재하고 있으나 대부분의 도장에서 자신을 타 도장과 구별하기 힘든 비슷한 기술을 구사하고 있고 그 도장의 뿌리와 자신을 가르친 스승, 그리고 그 스승의 스승을 알고 있는 수련자는 많지 않다. 이는 가르치는 사람이 전통을 중요시하지 않기 때문이며 예의를 소중히 하고 자신의 뿌리를 중요시해야하는 무도계에서는 매우 건전치 못한 현실이라 생각할 수 있다. 자신의 스승과 그 뿌리, 그리고 자신이 배운 기술체계가 어떠한 역사적, 철학적 발전을 따라 전수되고 자신의 손에 들어오게 되었는지를 명확하게 하는 것은 무술인에게 있어 자신의 이름을 찾는 것과 같이 중요한 과정이라 생각한다. 또한 그러한 과정이 있어야 그 전통을 바탕으로 자신의 새로운 스타일을 만들 수 있는 것이며 그 스타일은 자신이 원래 배운 스타일에 근본하고 있음을 명확히 하여 뿌리를 수련자들로 하여금 알기 쉽게 해 줘야 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자신은 반대로 타 무술인과 구별되는 류파를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운동에 특출난 사람은 많은데 제자를 도에 입각해서 지도하는 훌륭한 스승을 찾기 힘들고, 그리고 전통과 흐름을 경시하는 사상이 난무하고 있다는 것이 현재 국내 도장들이 대체로 한 세대를 넘기지 못하고 단명하는 큰 원인의 하나가 아닌가한다. 그것은 용꼬리보다는 뱀 대가리가 좋다는 오직 비즈니스의 장사원리로 단체를 만드는데 문제가 있으며 또 그러한 생각으로 새로운 무술을 만들기 때문에 깊이가 없는 것이다. 그냥 성인군자와 같은 글이나 말을 하면 그냥 인격자로 대접받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2000년10월31일 윤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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