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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옛날 추억 하나
    과거스토리 2010. 1. 5. 20:33

     내가 다녔던 고등학교는 강남에 있는 상문고등학교였다. ‘말죽거리 잔혹사’라는 영화로도 많이 알려진 곳이다. 고등학교 때에 내가 살던 곳은 사당동으로 넝마주의가 많이 살고 있던 곳이었다. 학교를 갈라치면 미군 쓰레기장이었던 냄새나는 방배동 고개를 지나서 말죽거리 쪽에 있는 학교까지 걸어서 다녔다.

      

      통학로였던 방배동은 내가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도 산을 깎아내는 공사가 한창이었는데 여기저기 웅덩이 같은 곳이 많아서 불량 학생들의 담배 피는 곳으로 혹은 결투를 벌이는 장소로 이용되기 일쑤였다. 선배들이 지나가는 후배들을 불러서 노래나 심부름 사역을 시키기도 했는데 나도 하교하다 걸려서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괜 한 트집을 잡혀서 맞기도 했다.

     

    (방배동 산에서 맥주병을 수도로 격파하고 있는 고교때의 나)


      한번은 선배 4명이 모여서 돈을 내 놓으라고 하는데 없다고 하자 무릎을 꿇려놓고 몽둥이와 발길질로 얼굴을 차는 등 때리기 시작했다. 착하게 생긴  한 선배는 그만 때리라며 말리면서 나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는 오늘 있었던 일은 다 잊어버리라고 했다. 어설프게 매를 맞은 나는 은근히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리고 “아닙니다! 잘못했으면 내일도 맞겠습니다!”라고 말을 해 버렸다.


    말리던 선배는 “이 자식 덤비네!”하면서 오히려 패기 시작했다. 집 아니 아버지 도장에 갔을 때는 이미 어린이 반 수련이 끝난 이후였다. 나는 어린이 태권도 사범으로 내가 가르쳐야하는 시간을 넘겼다. 아버지는 나에게 왜 늦었냐며 화를 내었다. 학교에서 오다가 선배들에게 단련을 받았다고 하자 다음날 학교로 전화를 해서 선배들을 도장으로 보내라고 했고 그 선배들은 내가 태권도 사범이었다는 사실에 놀랐고 도장을 찾아왔다가 도장입구에서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들고 있는 벌을 받아야만 했다.


    얼굴이 험상궂었던 조교는 윤사범과 대련을 해서 누가 잘 싸우나 결판을 내자고 했고 불량선배들은 모두 기가 죽어버렸다. 그 선배들이 도장에 올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용서를 받아오지 않으면 퇴학처리 하겠다는 선생의 불호령 때문이었다. 학교에 소문이 퍼지면서 그날 이후 방배동 통학 길에서 누구도 나를 건드리지 못하게 되었다.

             

    한번은 동창과 함께 하교 길에 방배동과 사당동 경계에 있는 골목에서 넝마주의 애들로부터 위협을 당하게 되었다. 친구는 한명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고 우리를 만만치 않게 본 상대는 어디론가 뛰어갔다. 우리는 도망간 것으로 판단하고 ‘별것도 아닌 것들이 까불어!’하면서 걸어가고 있는데 먼발치에서 열댓 명이 우르르 뛰어오는 것을 보게 되었는데 아까 도망갔다고 판단한 넝마 녀석이었다. 우리는 뭔가 잘 못 되었다고 생각하고 뛰었다.


     한참을 뛰었는데 넝마 애들이 더 잘 뛰었다. 바로 뒤에까지 다가온 넝마를 피할 수 있는 곳은 길옆에 위치한 합기도 도장이었다. 관장과 안면이 있었던 터라 급한 김에 도움을 청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뛰어 들어갔다. 뒤를 따라 넝마 패거리들이 들어오고 사무실에 있던 관장이 나오면서 다급한 나를 보면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파악하고는 벽에 걸려있는 목검을 잡았다.


    그리곤 큰소리로 기선을 제압하였다. “너희들 뭐하는 놈들이야?”넝마들은 우리가 자기들을 건드렸다고 하고 우리는 넝마들이 위협을 했다고 했다. 그러자 관장은 “좋아 너희들 한명씩 나와서 일대일로 붙는 거야 알았어!” 관장이 심판이 될 모양이다. 수적으로 열세인 우리는 긴장했고 숫자가 많은 넝마들은 허락받은 싸움이 좋은 듯 시끄럽게 환호하며 그중 떡 대가 좋은 한 놈이 손바닥에 주먹을 탁탁 치면서 앞으로 나왔다.


    순간 긴장이 스쳤다. 관장은 넝마들의 적극적인 환호에 사고가 날 것을 예상했다. 내가 실력이 뛰어나 싸움에서 이긴다고 해도 수적으로 또 기세가 하늘을 찌르는 그들을 모두 물리친다는 것은 불가능 했다. "그만~!”관장은 도장에서 싸움을 해서는 안 된다는 말로 처음과는 달리 싸움을 막았다. 결판을 내자고 떠들던 넝마들은 자신들이 이긴거라며 나갔다. 그날 이후로도 학교를 오가는 길에 가끔 마주쳤지만 그들도 나를 조심하기는 매 한가지였다. 오히려 골목에서 마주칠 때는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인사를 나누는 사이가 되어버렸다.        

                

      군대에서 휴가를 나왔다가 경험한 이야기이다. 나의 부친은 자식에게도 예외가 없이 강하셨다. 봉천동에 지금은 개천을 덮어서 도로가 되어 있지만 옛날에는 개울이었던 곳이 있는데 그 옆에 도장이 있을 때이다. 군입대후 첫 휴가를 보름동안 얻어 아버지 도장에 가서 있을 때이다. 오토바이로 석유배달을 하는 사납게 생긴 배달원이 석유를 가지고 왔는데 아버지는 외상으로 달아놓으라고 했다. 그러자 배달원은 “I C 8! 돈 줘요!” 하는 것이다. 이전에 밀린 것도 있는데 또 외상을 하냐며 말에 욕이 베어 나왔다. 그 소리를 들은 나는 아버지에게 욕을 하는 놈에게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욕을 해!”그러자 그는 나에게 “너 여기서 운동 하냐? 나하고 한번 붙어 볼래?”하는 것이었다. 한번 붙어보자고 하는 녀석에게 나는 더욱 화가 나서 “이 자식 죽을려고!”하며 압도적인 발언을 했다. 그 광경을 본 아버지는 둘 사이로 다가오며 입구에 서있던 석유 배달원에게 안으로 들어오라고 했다. “내가 심판을 볼 테니까, 그만 할 때까지 싸운다. 알겠지!” 석유배달원의 폭언에 큰소리 쳤다가 졸지에 스트리트 파이터가 되었다. 그렇게 한 번 붙었다. 한사람은 군복을 입고 한사람은 기름때 묻은 청바지에 잠바를 입고. 아버지는 심판이 되어 룰도 없는 시합이 시작되었다.

     

      너무 긴장한 탓일까? 눈만 부릅뜨고 찬스만 보이면 한방에 끝낼 것처럼 노려보면서 경계만 하고 있었다. 발차기로 혹은 주먹으로 휘두르기도 했지만 서로가 너무 경계를 하다 보니 헛스윙만 하고 있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가자 아버지 왈 “그렇게 할 것 같으면 관둬, 그만!”우리 아버지는 대단하셨다. 나는 그런 상황에서는 자식을 보호하려 했을 것이다. 자식이 맞아도 안 되고 상대가 다쳐도 결국 불행해진다. 하지만 우리 아버지는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용감하다.

     

    초등학교 때는 친구와 싸우는 것을 말리기보다는 지켜보셨다가 왜 닭싸움을 하냐며 밤새도록 샌드백을 치게 하고, 중 고등학교 때는 지옥과 같은 훈련으로 실명할 뻔 했던 적도 있었다. 아버지 앞에서 나는 절대 져서는 안 되는 철인이 되어야 했다. 그렇게 강해지고 있었고 강한 것을 더욱 필요로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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