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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증명이 없으면 신용도 없다! '격투기에서 아이키도로'
    과거스토리 2010. 6. 24. 18:18

      얼마 전 무에타이 체육관으로 성공한 김대곤 관장이 대학교 졸업논문에 한국 무에타이 도입에 대한 조사를 하면서 내 도장을 다녀갔다. 한국에서 무에타이를 이야기 할 때에 내가 빠질 수 없는 것은 그 당시 일어났던 여러 일들과 사건들의 중심에 내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은 전혀 다른 무도를 하고 있지만 이전에는 최고 강한 것만을 주장하며 시간을 보냈었다. 아래 사진은 근 20년 전에 무에타이를 한국에 처음 소개하면서 만들었던 선전지이다. 도전을 받는다는 선정적인 문구가 그 당시에 자신감을 말하고 있다.

     

     (강함의 완성/도전을 받습니다) 

     

      태권도 5단이며, 합기도 6단이었던 나는 격투기 신인왕전에 출전하여 우승하고 나서 1985년도에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챔피언 결정전에서 상대를 KO시키면서 최우수선수로 격투기 한국 챔피언이 되었다. 그 다음해부터 일본에서 열리는 극진공수도 대회를 3년 동안 출전하게 되었다.

     

    (85년 장충체육관 윤대현 참피온 타이틀전 우승)

     

     나는 이전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전혀 새로운 경기방식이 마음에 들었고 최영의 총재를 모시고 나를 강하게 만드는 것은 물론 한국에서도 기량 있는 후배 선수들을 만들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최영의 총재가 한국을 방문하였을 때에는 내가 주도하여 전국 관장들을 모아서 강남 에메랄드호텔에서 환영연회를 열었다.

     

    (좌측이 신의 손 최영의 총재이다)


     영동 리버사이드 호텔에서 에메랄드 호텔까지 이동하면서 나는 최영의 총재의 의향을 묻는 질문을 했다. “한국에도 극진공수도를 보급 확대해야 하지 않겠습니까?”그러자 최영의 총재는 “한국에는 태권도가 있는데...”말꼬리를 흐렸다, 한국에서 태권도와 공수도의 대결로 보일 수 있다는 최영의 총재의 깊은 의도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나는 국제격투기연맹을 창설하기로 마음먹었다. 한국에서 기량 좋은 선수들을 만들어 세계에 한국 선수들의 기상을 드높이겠다는 웅장한 계획을 세웠다. 사회단체를 만들고 MBC문화체육관에서 대회를 개최하기 시작했다. 스폰서를 잡기 어려웠던 당시에 많은 대회를 열기 위해서는 적지 않은 자금을 직접 조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당시 전국에서 가장 많은 대회를 개최하는 단체가 되었고 체력이 뛰어난 선수를 일본 극진공수도 대회에 출전시키기도 했다.


      격투기 조직을 만들고 나서 짧은 시간에 126개 지부도장이 가입을 했다. 격투기 기술을 정리해야 했는데 권투의 주먹과 극진공수도의 발차기를 접목시켰다. “증명할 수 없으면 신용할 수 없다!”는 최영의 총재의 주장에 마음을 빼앗겼던 나는 격투기의 원조격인 타이복싱을 받아들이기로 마음먹고 태국을 안방 드나들듯 왕래하기 시작하였다. 

      

     대한무에타이협회 엠블럼과 태국 신문기사

     

       방콕 팔레스 호텔에서 94년10월28일 70여명의 기자들이 모인가운데 가입 승인을 하는 회견을 가졌다. 태국 내 tv와 신문에서 한국을 9번째 무에타이 국가로 가입되었다는 뉴스가 보도되었다. 이전까지 태국 내에서도 ‘타이복싱’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우리가 가입을 하던 시기에 정부에서 정책적으로 ‘무에타이’라는 단어로 통일해서 사용하라는 선전을 시작하고 있었다. 이때 나는 국제격투기연맹을 대한무에타이협회로 명칭을 변경하고 대표가 되었다.   

     

    (선수 손이나 들어주는 것은 내 길이 아니었다)


      그렇게 격투기에서 극진공수도로 다시 더 강한 무에타이로 진행이 되었는데 정작 나 자신은 강한 것과는 무관해지고 있었다. 선수를 만들어내고 시합을 주최하고 있었지만 내가 링에 올라가서 뛰는 것이 아니라 링 바깥에서 지켜보는 위치에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최고의 선수를 만들겠다는 생각이 태국 현지 챔피언을 초청하게 되었고 근 3년 동안 반팻, 꾸싯, 댄 과 같은 트레이너를 불러들여 선수들의 기량을 높여갔다. 그러나 태국과 한국의 실정은 완전히 달랐다. 태국에서 회비를 내면서 훈련을 하는 사람은 외국인 관광객이 전부이고 현지인들은 메니져에게 돈을 받으면서 훈련을 한다. 선수는 시합에서 메니져에게 수익을 올려준다.


      수련비를 내가면서 훈련하는 한국의 수련생들에게 태국에서 초청한 트레이너는 도장 운영을 위해 선전하기에는 좋았지만 실제 훈련에서 태국처럼 지속적인 훈련과 강함을 유지시키기에는 환경적으로 어렵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다. 또 챔피언을 만들었다고 해도 오랜기간 지속하기 어렵고, 참피온 이라는 명성이 사회적으로 성공이라고 하기에도 어려웠다.

     

     강력한 투기는 젊었을 때는 가능하지만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서 어린 사람들에게 밀려날 수 밖에 없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그러한 마음이 깊어 갈수록 내 마음은 무에타이와 멀어지고 있었다. 아무리 돈을 많이 벌수있었다 해도 가치가 떨어진다면 그 일에 메달리는 것은 의미가 없다.

     

    (세계본부에서 도주의 수련을 마치고 도주와 함께 기념 촬영) 


      투기의 중심 속에서 나는 우연하게 나타난 ‘아이키도’를 보게 되었고 나이 많은 고수들이 많은 것을 보고 이것이 내가 마지막까지 파 해쳐야 할 운동이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무에타이와 비교해서 너무나 어이없고 약하게 보이는 ‘아이키도’를 이해하지 못했다. 무언가 있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는 것은 일본에서 만난 ‘고수’들의 성품과 감각적 기술이었다. 그 느낌은 정확했으며 여러 선생들로 부터 더 많은 것을 알아갈 수록 일본 무도의 깊이를 배워갔다. 아이키도가 최고라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무에타이와 검도가 전혀 다른 세상이듯 아이키도 또한 격투기에서 느낄 수 없는 또 다른 세상에 있었다. 


    “아이키도는 일반 격투기에서 찾아볼 수 없는 전혀 다른 깊이가 있다!”


      아이키도를 통해서 고대의 검술을 알아가고 아이키도가 추구하는 기술과 정신적 성향을 이해하면서 아이키도가 이 시대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하고 소중한 무술인가를 이해하게 되었다. 그렇게 88년부터 시작된 나의 아이키도는 시작한지 20년 만에 한국을 44번째 아이키도 국가로 정식 가입을 하게 되었다.

     

     (사단법인 대한합기도회 / Korea Aikido Federation)   http://www.aikido.co.kr

     

    국제연맹 멤버확인 싸이트http://www.aikido-international.org/index.php?option=com_wrapper&view=wrapper&Itemid=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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